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불공평한 세상, 그러나 만민에게 평등한 것이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이 만들어내는 세월은 사람에 따라 문화에 따라 재구성된다.

문화는 전통을 만들고, 전통은 속담을 빚어낸다. 속담을 통해 바라본 우리의 가치관은 현재숙명적이라고 한다.

“백지 한 장의 앞도 못 본다”거나 “산 넘어 산이다”라고 체념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많은 속담이 미래지향형으로 “죄는 지은 데로 가고, 덕은 닦은 데로 간다”고 전망하는 것. 그 다음이 과거긍정형으로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수긍한다.

과학적으로 말할 때 현재는 찰나에 불과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지금이라 생각하는 순간 과거로 묻히고, 그렇다면 문자 그대로 ‘오지 않은’ 미래만 뇌리에 맺혀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중 언제를 생각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느낌을 갖는지에 따라 민족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포함한 인생을 투영한다.

선각자는 난국(難局)에서 질서를 되찾고, 위기에서 기회를 건진다.

세월호가 국민의 미래와 함께 일렁이는 바다에 가라앉은 지 1년, 나라는 여전히 한 달에 한번 대형 인재에 시달리며 국민은 아직도 불안해 하고 있다.

정부는 늘 대책을 발표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금방 식어버리는 열정처럼 요란한 경적 뒤엔 다음 일이 터질 때가지 일상이 되찾아 온다. 점검이나 감시만 제대로 했어도, 민원에 좀더 귀를 기울였어도, 이윤추구에만 몰두하지 않았어도 더러는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

일각에선 월성1호기의 계속운전 허가결정을 취소하기 위해 국민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한다. 최신기술기준 적용이 미흡하고, 여러 원전이 동시에 사고 났을 때 환경에 미치는 영향평가가 결여되었으며, 주민의견수렴절차를 무시했고, 안전성을 확보한 뒤에 계속운전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린 데 대한 업보가 아닐까. 최근 재가동에 들어간 한빛3호기가 원자로냉각펌프 고장으로 멈춘 지금도 불안은 잦아들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한편으론 과로에 시달리는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안전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점검과 대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원안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안전위원회인가 진흥위원회인가. 혹자는 원전안전은 정서가 아니라 공학이고, 정치가 아니라 기술이니 원안위 같은 전문집단이 내린 결정은 믿고 따라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이 그렇게 생각할까. 원전과 불편한 동거를 하는 주민의 불안이나, 현장에서 안전을 밀착 감시하는 전문가의 제언은 정서이거나 정치란 말인가. 일어나지도 않을 사고로 국민 불안을 부추긴다고 몰아붙이면 대한민국 원자력은 설 땅도, 갈 데도 없다.

이젠 50년 넘긴 과거를 기억 속에 묻고, 앞으로 50년 산 넘어 산을 또 넘어, 백지 한 장 앞도 못 본다는 미래를 국민과 함께 다시 설계할 시점이다. 비리(非理)는 과거로 보내고, 구관을 명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수력원자력은 더 이상 오르려고만 하지 말고, 국민 눈높이로 내려와야 한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다. ‘한 수 위의 원자력’, 즉 ‘한수원’으로 국민 앞에 유리처럼 투명한 초상화를 다시 그려야 한다.

영어에서 1월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두운 그믐달을 뒤로 하면 어스름한 초생달이 보인다.

월성1호기 계속운전은 한국 원자력의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원년(元年)이어야 한다. 허나 보름달은 거저 떠오르는 게 아니다. 한 닢 설비투자에 만족하지 말고, 두 닢 안전장치를 증강하고, 세 닢 사기진작에 진력하며, 네 닢 국민신뢰를 회복하고, 그래서 15일을 15주만큼 투자하며 한가위를 예약해야 한다.

절망은 백해무익, 모두에게 상흔으로 남을 수밖에. 시대는 커다란 흐름이고, 지워지지 않을 자국이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듯 과거 절망의 기록은 미래 희망의 전조일 수 있다. 

더 멀리 보면 시간은 끊임없이 다가왔다 어느덧 지나간다. 아무리 원전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안전이 우리를 지치게 하더라도 포기하면 편하다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절망은 무책임한 태만이다.

원자력계는 오늘도 부지런히 원전을 추스르고, 언제라도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201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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