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2000년대로 넘어가는 길목, Y2K로 한창 세상이 어수선할 때 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있었다. 예상과 달리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양인이라는 것을 보고 실리콘밸리를 잘못 찾아온 건 아닌지 의아했다. 밸리크리스챤 고교 학부모들도 동양계가 절반이 넘었다. 관현악단도 지휘자 빼고 악장부터 단원들까지 대부분 동양인.

학부모들은 거의 모두 정보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사실 실리콘밸리 전체가 이렇게 변모해가고 있었다. 이처럼 이방인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곳이 실리콘밸리다. 이방인, 특히 고급 기술자들이 와서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공감하는 실리콘밸리의 최고 경쟁력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날씨, 이곳은 365일 화창하면서도 습도가 낮아 늘 쾌적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곳 날씨는 경이로움 그 자체, 사시사철 꽃내음, 새소리는 천상의 세계였다. 이게 바로 전 세계에서 몰려든 최고의 인재들을 꼭 붙들고 있는 마력이 아니었을까. 실리콘밸리에서 숨 쉬고 사는데 드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쿠퍼티노엔 애플 본사가 있다. 스티브 잡스가 홈스테드고교를 졸업하던 1970년대에는 거의 백인만이 살던 동네였다고 한다. 인텔, 휼렛패커드 등 세계적 기업들과 구글, 페이스북 등 인터넷 거장들의 보금자리인 실리콘밸리는 미국 경제의 희망이고 캘리포니아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런 이곳을 동양인들이 받쳐주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의 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중 이민자 창업비율은 52%에 이른다. 실리콘밸리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혁신의 힘이 이민자에게서 나온다는 방증이다. 대부분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는 중남미 이민과 달리 박사급 동양인들은 이곳 실리콘밸리의 연구개발을 선도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미국인 기술자를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다.

실리콘밸리의 다양성과 포용력은 가히 수준급이었다. 다문화에 대한 관용과 외래인과의 상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는 없었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혁신비결을 열대우림의 생태계에 비유한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열대림의 다양한 잡초에서 억센 생명력이 나오는 것처럼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교류가 일어나면서 가장 큰 경제적 효과가 나온다고 설명한다. 이종 간의 협업과 실험을 통해 기발한 혁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MIT 잡지에 실린 ‘기술과 불평등’ 이라는 글은 유럽에 비해 미국에서 빈부격차가 심해졌다는 것으로 운을 떼고 이것이 기술발전 때문이라고 이어진다. 실리콘밸리에 부가 쌓이는 것과는 별개로 시간당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이 여전히 많고, 실리콘밸리 남쪽 주민 5분의 1이 빈곤층이라고 한다. 중간층은 이제 사라지고 아주 부자이거나 아주 가난한 사람들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글은 첨단기술 직종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가 골고루 돌아가도록 교육의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넘어가며, 기술이 더 발전할수록 미국의 미래가 점차 실리콘밸리의 모습을 닮아갈 것인지, 그렇다면 소수만 부자가 되는 사회가 창의력과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을지 물으면서 끝을 맺는다.

어쨌든 실리콘밸리는 전통적으로 혁신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산업화해 기존산업을 무너뜨려 왔다. 이러한 실리콘밸리가 이젠 에너지 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파괴할 차례라고 발표하며, 그 시기가 2030년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필요한 도구이자 기술이 바로 태양광, 에너지저장장치, 전기차, 자율주행차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반도체와 컴퓨터, 인터넷이라는 이른바 정보기술을 주도해왔다. 에너지와 자동차 기술은 바닥부터 다르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가진 않지만 전망이 맞아떨어진다면 1경원에 이르는 세계 전력산업은 뿌리째 뽑히고, 기존 전력회사와 제조회사들은 새로운 회사들로 메워질 것이다. 이러한 예측에 점점 더 많은 전문가와 기관이 동의하고 있다. 사우디 전 석유부 장관도 그 중 하나. 버핏도 태양광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구글, 애플, 아마존 등도 에너지 산업에 발을 들였다.

이제 국내로 눈을 돌리면, 한국전력은 12일 광주에서 개최된 빛가람전력기술박람회에서 국내외 전기, 전력 분야 기업 및 기관과 기술교류 정례화, 상호 협력체계 강화 등을 위한 대규모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편 광주전남 혁신도시로 이전한 한전이 지역사회와 공동발전하기 위해 추진 중인 빛가람 에너지밸리 구축을 가속화하고, 전력분야 신기술의 최신 정보와 전략을 공유하기로 했다. 정부와 산업계는 이제부터 기존산업을 무너뜨릴 과감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다시 실리콘밸리로 돌아가 보자. 애플의 핏줄에는 기득권에 저항적인 히피문화가 흐르고 있다. 쿠퍼티노는 다양한 사고가 교류하는 문화를 가진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면서, 자유로운 사고가 교통할 수 있는 곳이다. 잡스는 고등학교 때 인턴을 한 경험이 있는데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이런 행동을 보수적인 기업에서 할 수 있었을까.

빛가람 에너지밸리가 거미줄처럼 엮인 현대산업사회라는 열대림에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햇빛과 설 자리를 찾아 두터워지고 커나가려면 우선 생각의 틀을 바꿔야한다. 최고경영자들의 혈관에는 저항과 도전의 피가 흘러야 한다. 기득권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하지도 말 것이며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고, 급류를 거슬러 헤엄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확 바뀌게 될 세계 전력시장에서 해묵은 국산화나 국수주의를 내세우다간 에너지밸리로 탈바꿈해가는 실리콘밸리의 뒤꽁무니밖에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빛가람 에너지밸리의 경쟁대상은 다문화 다인종 최고기술자들을 진공처럼 빨아들여 에너지와 자동차 산업을 겨냥하며 잰걸음으로 나가는 실리콘밸리다.

한전이 나주 빛가람혁신도시에 중소기업 사업화 연계기술개발을 위한 에너지밸리센터를 건립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에너지밸리센터는 에너지효율 1+등급, 녹색건축 우수등급은 물론 전체 에너지의 20%를 신재생으로 공급하는 절약형 친환경 건축물로 설계된다니 국내에도 바야흐로 혁신과 창조의 에너지 산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빛가람을 세계인의 머리에 새기고 가슴에 품을 수 있게 하는 ‘구호’다. 애플은 “달리 생각하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IBM의 ‘생각하라”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빛과 가람을 기치로 세상을 바꾸자. 그리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최고급 에너지단지로 빛가람을 각인해 나가자. 관료주의와 국가주의에 맞서, 세상을 비추고 가람처럼 흘러가자.

2030년까진 빛가람을 세계인의 가슴 속에 자리 잡도록 하자. 빛가람을 좋아하는 세계인들은 그런 정신과 이상을 받아들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한류문화로 이어질 것이다. 신기술의 놀라움, 에너지의 깨끗함에 세계인이 열광하게 만들자. 전기에 색칠을 할 수 있다면 그 아름다움에 세계인이 감동하게 만들자.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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