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 로벌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정희성 시인.

제가 터 잡고 사는 곳은 제주 서귀포하고도 신풍리라는 작은 중산간마을입니다. 마을 지형이 이태리 지도마냥 장화 모양이어서 바다 쪽 방향 발바닥쯤엔 포구도 있는 마을입니다. 포구가 있는 만큼 어촌계도 있고, 해녀 삼촌들도 서른 명 남짓 여전히 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제 집을 찾는 길손들 대부분은 제주도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길이 낯설어서인지, 신풍리 제 집을 쉽사리 찾지 못합니다. 워낙 외진 곳이라 디지털 길잡이인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안심이 아니 되는지 제주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를 달려오면서 서너 번씩 확인전화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제가 놀리듯, “길을 잃어야 신풍리가 보이니 그냥 편하게 오세요! 오다 보면 오겠지요!”라고 합니다.

지리적으로 신풍리는 옛 정의현 터인 성읍 민속마을을 거쳐 해비치 호텔과 해비치 해변으로 이름난 표선으로 내려가는 번영로(97번 도로)의 끄트머리쯤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만나는 중산간마을입니다. 그런 만큼 까딱 한눈을 팔다간 지나치기 쉽습니다. 반대로 옆마을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갤러리를 들렀다 가는 길손들이 바닷가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다 잠깐 한눈을 팔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신기루처럼 마주치는 마을이 신풍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에 ‘길을 잃어야 신풍리가 보인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고생고생 찾아 들어와서는, 누구든 첫마디로 꺼내는 말이 ‘참 좋다!’입니다. 제주도 전역이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특별부록’인만큼 발길 닿은 곳, 눈길 머무는 곳 어디든 다 절경이고 기억에 남는 풍광을 자랑하는데, 굳이 외딴 농가주택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참 좋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이유를 집주인인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

요즘 절기에는 십중팔구 등황색으로 익어가는 감귤 때문일 것입니다. 본디 귤밭이었던 서북쪽 땅 오십여 평을 떼내어 꽃나무도 심고 화초도 가꾸어 자그마한 뜨락을 만들어놓은 걸 보고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뜨락 한가운데 키가 세 길이 넘는 하귤나무가 주렁주렁 큰 열매를 달고 노랗게 익어가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 년쯤 키운 구골백서나무 앙증맞은 꽃떨기가 꽃을 활짝 피워 몸에 배이도록 은은한 향기를 내품는 것에 반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동백나무 아래 평상에 걸터앉아 정담이 무르익어갈 무렵, 나그네들이 반드시 묻고 넘어가는 질문이 있습니다. “제주 와 사니까 어떤 것이 좋습디까?”라는 질문입니다.

묻는 이는 간단하지만 대답하는 처지로선 참 답하기 난감한 질문입니다.

그저 속마음 그대로 ‘편해요!’라고 하고 싶어도 조금 성의 없는 대답인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수다를 떨기도 뭣한 것이 자칫 제주 산다고 유세떠는 것처럼 오해를 부를까 싶어서입니다. 그런 고심 끝에 나온 인사치레가 “생기를 되찾았어요!”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제 개인사에선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1983년부터 군 복무 기간을 빼고는 20년간 현역 출판잡지인으로 살았습니다. 2009년에 제주로 내려오기 직전까지도 현역은 아니었어도 책과 잡지 관련 기획과 집필 일을 하고 대학에 출강하면서 서울에서 살았으니, 그간 근 30년 ‘대도시 직장인’으로 지낸 것입니다.
그 30년 동안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착각으로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은 자기변명이었고, 사실 밥벌이 때문에 발 담근 분야에서 그럭저럭 경력을 쌓다보니 양푼만한 명예도 생겨난 것에 기대어 자기 삶을 모양 좋게 치장해 보려는 꾸밈말이었습니다. 

흔히 싫어도 돈을 벌 수 있기에 하는 일이 ‘직업(Job)’이고, 돈은 못 벌어도 좋아서 하는 일이 ‘워크(Work)’라고 합니다. 이 기준으로 말하면 전 30년간 돈벌이만 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적게 벌거나 못 벌어도 좋으니, 워크라는 걸 좀 해보자! 이렇게 마음먹고 결심한 것이 제주 이주였습니다. 제가 내려온 2009년도엔 귀농·귀촌 붐도 불기 이전이라 그냥 ‘제주로 이사했다’는 것이 더 걸맞은 표현입니다.

연고라곤 전혀 없는 타향 땅이니 터 잡고 정 붙이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태생이 잡지장이라 경계가 없고, 살림집마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덕분(?)에 금세 마을 형님들과 정을 나누게 되어 남보다 수월하게 정착, 아니 적응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 제주로 들어와 올해까지 팔 년째 살면서 ‘손익계산’을 해보니, “뭐가 좋아요?”라는 물음에 접했을 때 “생기를 되찾았어요!”라고 답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이득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생기란 단순하게 말해 제 몸의 신진대사가 생생하게 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람 좋고 햇빛 좋은 시골마을이니 눈도, 목도, 폐도 편합니다. 이 편해진 통로를 통해 맑고 깨끗한 에너지가 들어오니 몸이 생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 삼팔선 이북 운천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그때 느끼며 누렸던 청정한 기운 이상을 매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기를 되찾아 귤농사도 소농 규모로 짓고, 시를 짓는 ‘좋아하는 일’을 하니 이 정도면 수지가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생기 말고 다른 것은요?’라는 물음도 던집니다. 그러면 앵콜송을 준비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비된 한마디를 던집니다. “내가 비로소 바보라는 걸 알아서 좋지요!”라고 말입니다.  
     
제가 명색이 시인에다 문학석사, 30년 경력의 잡지인으로 국내 유수의 여성지 편집장을 역임했고, 문학전통에 빛나는 동국대학교에 출강도 했던 처지라 이력서 몇 줄은 채우는데, 알고 보니 그게 다 허망한 자랑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차원 평면에서 헤매다 공간이 주어지는 입체의 3차원 세상에 옮겨 놓인 듯한 어리둥절함 속에서 살면서 ‘참 모르는 게 많다’는 자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내가 참 바보네!라고 장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무와 풀, 들꽃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애교로 봐줄만 합니다. 농사일을 몰라 가르쳐 준 걸 또 깨묻는 어리숙함 또한 봐줄만 합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제가 무지하고 오만하게 살았다고 깨닫게 해준 것은 태풍의 힘이었습니다. 제주살이 8년 동안 한 열 번쯤 태풍을 맞았는데, 올해만 해도 ‘차바’라는 지독한 놈과 만났습니다.
‘차바’ 같은 중형 태풍이 오면, 전 다시 한 번 바보처럼 몸을 떨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태풍이 지나가기를 납작 엎드려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견디는 침묵과 겸손의 시간’을 거치면서 또 한 번 저의 미약함과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서재에 꽂아놓은 장서 3천 권도 가르쳐 주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오늘처럼 날 좋은 날, 홑이불처럼 따스하게 제 몸을 감싸는 제주의 가을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되물어 봅니다.

‘오늘도 나는 내 목숨 값을 제대로 치르며 하루를 살고 있는가?’

제가 제주에서 무상으로 선물 받은 생기의 값을 치르는 것도 쉽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정희성
시인. 글로벌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제주 서귀포 신풍리에서 귤농사를 지으며 시를 짓는 농부시인이다. 
무공해 귤농사 작물을 도시인들에게 직판하고 있다. 10kg 한박스 25,000원이다(택배비 포함)
독자분들 가운데 관심있는 분은 정희성 시인에게 직접 전화로 신청하거나 카톡, 문지, 폐북 등을 이용하면 된다. 직접 전화도 무방하다. 
정희성 시인 전화 010-6277-0368

제주도 여행갈때 정희성 시인 댁에 들려서 민박을 하면 별을 보며 시담을 나눌수 있어 좋다.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상동로 12(신풍리 729-1)
* 농협 356-0200-2243-33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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