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성원 주필

만산에 붉은 잎이다. 가을이 어느덧 우리 곁을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계절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산다는 사람들이 올 가을에는 유독 많다. 시속(時俗)이 어지럽고 미덥지 못한 까닭이다. 근심과 걱정의 울타리가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으니 마음에 안락도 유연성도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주머니 사정이 나쁘면 만사가 어둡게 보이기 마련이다. 나라 경제가 좀체 나아지지 않으니 현재가 과거보다 우울하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우울할 거라는 불안감이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멈춰선 성장, 높은 실업률, 불안스런 일자리 등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키워드’다.

정부의 총력 투쟁(?)으로 부동산 경기는 회복 조짐이지만 경기회복세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이 역시 주머니 사정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실질 국민소득, 곧 국민의 구매력이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음이 그 반증이다. 구매력이 악화된다는 것은 경제활동의 악재 중에 악재다.

사람은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소비를 줄일 수는 있다. 고통스럽지만 덜 벌면 좀 덜 쓰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소비가 줄어들면 공장이 문을 닫아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유효수요, 즉 구매력 있는 소비자에게 의존하여 굴러간다. 이런 메커니즘에서 구매력이 악화된다는 것은 결정타를 맞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내수 시장에서의 구매력이 작아 해외, 이른바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황이 이러한데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과 ‘늘어나지 않는 유효수요’가 빚어내는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근래 들어 세계경제마저 침체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최근 IMF(국제통화기금)와 WB(세계은행)에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겠는가. 경제침체의 위험성이 증대된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 시장에서의 유효수요가 약화 내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세계 시장에서의 유효수요가 실종됐다고 까지 경고하는 상황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도, 유럽도, 중국도 모두 수출을 외치는 형국이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웅변해 주는 사례다. 자기 나라에서 유효수요가 없으니 해외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도 그게 없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해결하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주문인 셈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정부가 긴급하게 5조원 규모의 추가 부양책을 내놓은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세월호 참사 여파에서 벗어나는 듯이 보였던 경기가 다시 침체 조짐을 보이는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음은 물론이다. 생산, 투자 등 제조업발(發) 주요 경제지표가 나빠지고 있고, 소비는 회복세가 더딘 가운데 유럽, 중국, 일본 경제 등 외부 여건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현실이 이런 만큼 지금은 중장기적인 유(有)불리(不利)를 따지기에 앞서 유효수요의 실종 사태를 막는 게 급선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각국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민간 대신 유효수요 창출에 나섰던 경우와 맥락을 같이하는 셈이다.

정부의 핵심 관계자가 “경제 구조개혁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급한 대로 부양책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실토한 사실에, 그래서 이해가 간다. 하기야 부양책이 소비와 투자 증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3~4개월 후 경기가 더 가라앉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솔직히 그때는 어떤 정책 수단도 마땅치 않다는 점 또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권위의 경제학자들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막는 데 실패했다. 미국 정부가 숱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돈을 찍어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용단을 내리고, 끝내 경제 살리기의 불꽃을 살린 사례는 그래서 ‘유효수요의 실종시대’에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 있을 듯싶은 생각이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정부의 역할과 과단성은 때론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뢰를 잃은 정치권도 이번 만은 관련 법안 통과로 협조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냥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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