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우 한국표준협회 전문위원, 부천大 겸임교수

박재우 한국표준협회 전문위원.

건축자재의 난연성 시험을 의뢰받은 한 시험원은 부실한 시험성적서를 발부한 사실이 내부고발에 의해 언론에 보도된 바 있었다. 한 드라이비트 제조업자는 시료용 제품과 일반 제품을 달리 만들고 있다는 보도까지 있었다. 이러한 자재로 지은 건축물이 화재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구 서문시장 화재,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와 밀양 요양병원 화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모든 국민들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재, 대구지하철 화재, 마우나 리조트 붕괴, 세월호 침몰 등등. 일일이 언급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았던 대형 사고 뒤에는 항상 불량 자재나 부품, 불법 구조변경, 허술한 안전관리, 위조된 시험성적서, 또 자신들의 순간 이익을 위해서 저지른 일부 공무원들의 유착 및 직무유기 등이 원인으로 밝혀지곤 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 ‘표준’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일정한 규율(도덕)과 지침(법)은 공동생활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필수였으며, 이를 지키고 따르지 않을 때에는 엄격한 제재가 따르기도 했다. 그것이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 조건이었으며, 따라서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사회가 붕괴되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익숙함’ 때문이다.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신입생이 가졌던 신선함과 기대,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불안은 교칙을 준수하는 동기였으나, 멋진 선배들이 보여 주는 일탈과 요령은 결국 ‘표준 미준수’였다.

신입사원이 가졌던 설레임과 열정은 사규와 원칙을 따르는 기본이었으나, 융통성과 유연함으로 포장한 고참의 처신은 역시 ‘표준 미준수’였다. 첫아기를 가졌을 때의 놀라움과 두려움과 소중함은 육아의 모든 것을 조심하게 하는 원천이었으나, 둘째 셋째를 갖게 되면서 스스로의 익힘과 앎으로 인해 아이에게 조금씩 소홀해지는 것 또한 ‘표준 미준수’에 다름 아니다.

익숙함의 또 다른 이름은 ‘융통성’이다. 우리 민족은 융통성이 뛰어나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견뎌냈던 것도, 내적으로 수많은 갈등을 이겨냈던 것도 융통성이었다. 전쟁의 페허 위에 아시아의 용이 되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도 융통성의 산물이었다. 그렇듯이 융통성이란 우리 민족의 원동력이자 훌륭한 DNA였다. 그러나 이것이 양(+)으로 발산하면 창의성이 되고, 음(-)으로 작동하면 잔머리가 된다는 것도 우리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다행히 최근 국토부를 비롯한 일부 중앙부처에서 시험·인증 기관의 부당한 인증 시 영업정지 등 관련 법·규칙 개정을 추진해 인증 관리 감독을 강화한다고 한다. 늦었지만 당연한 조치다. 그동안 정부 인증기관의 자체 인증, 심의위원 선발 관리 미흡 등의 문제가 제기돼왔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표준은 준수돼야 한다. 그리고 표준은 감시되어야 한다. 불법한 일은 견제돼야 하고, 불량한 제품은 통제되어야 한다. 또 시험성적서는 신뢰가 있어야 하고, 공무원은 정당해야 한다.

국민 안전은 형식이 아니고 실행해야 하는 지침이며, 국민 행복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는 표준이어야 한다. 부실한 시험·인증·평가가 적합성 평가기관의 난립에 따른 과당경쟁의 부산물은 아닌지 되새겨 볼 시점이다. 융통성이 음(-)으로 작동해서는 안된다. 오는 5월 25일 열리는 “방재의 날”을 앞두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 표준 한국을 기대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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