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광장의 세르반데스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길을 끈다. “1547∼1616 세르반데스·미쳐서 살다가 깨어서 죽었다.”

돈키호테를 통해 우리들에게 너무도 친숙한 세르반데스는 내놓은 작품마다 세상을 풍자하고 고발해 모든 세상 사람들과 함께 깨어서 죽고자 했다. 일생을 깨어서 살다가 깨어서 죽는다는 것. 그리 쉽지 않다는 묵시적 경고이기도 한 셈이다.

상식적이겠지만, 대개의 경우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삶을 마감한다. 예컨대 돈에 미쳐서, 권력에 미쳐서, 명예에 미쳐서, 그리고 때론 사람에 미쳐서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삶을 끝낸다. 겨우 극소수의 사람만이 세르반데스처럼 미쳐서 살다가 그래도 깨어서 죽는다.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를 내세워 깨어서 죽고자 했던 것은 이 당시의 야만적인 시대 상황을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던 탓이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군주의 횡포, 종교전쟁 시기의 증오와 대립, 그리고 이로 인한 분열이 난무하는 야만의 현장에서 끝내 미쳐서 살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깨어서 죽고자 했던 절규는 그래서 비록 국적을 달리했지만 프랑스의 톨레랑스(관용) 운동으로 맥이 이어지며 빛을 발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톨레랑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뜻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만을 내세우고 상대를 무시하면 이기적인 독선에 흘러 결국 야만적인 사회로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톨레랑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도 같은 개념이랄 수 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우리의 훌륭한 전통적 덕목이나 다름없다. 이런 덕목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진정한 톨레랑스의 사회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 걸음 더 내 디뎌 세르반데스의 시각이나 톨레랑스의 개념에서 조명해 본다면 과연 어는 수준의 위상일까. 아직까지는 결코 야만의 시대로 정의하거나 몰아가고 싶지 않은 게 우리 국민의 일반적 정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죽을 일들과 그런 분위기가 적지 않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끌어안기보다는 갈라지고 해체되는 모습과 행태가 어떤 면에선 더 만연되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근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의 족적을 남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도 역설적으론 우리의 야만적 수준을 드러낸 일대 사건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교황의 손짓 한 번에 그 많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단순히 ‘프란치스코 효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탓이기에 더욱 그렇다. 세월호 유가족 등 마치 한 많고 소외 받는 듯한 계층의 사람들이 교황 면전에 줄을 이은 장면은 그래서 우리 내부의 뭔가가 크게 잘못된 게 아닌지 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을 만큼 너무나 유별난 나라다. 누군가 불꽃만 당겨주면 무섭게 타오를 국민적 에너지가 충만한 국가다. 교황의 방한도 이런 유별난 국가의 저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야만의 시대를 끝낼 저력 역시 우리 내부에 내재돼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메시지를 통해 ‘답을 찾는 건 여러분 자신의 몫’이라고 역설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연정선에서 교황은 방한을 통해 우리의 야만적 병근들을 태워버릴 불꽃 역(役)까지 자임(自任)하지 않았는가.

교황은 우리에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인간은 모두 조금씩 문제가 있기에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아직도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지 않고 고집스럽게 요구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여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교황님을 이용하거나 빙자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황은 방한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효과까지 우리에게 안겨, 경제 살리기에도 큰 보탬을 줬다. 이제야말로 교황이 우리를 향해 들어 보였던 엄지를 우리들 서로에게 높이 들어 올려 보답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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