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한미 양국이 4년이 넘는 협상 끝에 원자력협정 개정안에 가서명했다.

국내에선 선진 호혜적이다,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 길이 열렸다, 자율권 심지어 핵주권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당일 필자는 태평양 원자력 출장 길에 오르며 불현듯 향불 없는 젯밥을 떠올렸다. 차려 놓아 봤자 먹을 것도, 먹을 수도 없는.

아니나 다를까 필자가 중국에서 만난 미국 전문가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동 협정이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농축과 재처리 권리를 계속 불허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영문과 국문 협정이 혹 달랐던 것일까. 가뜩이나 짙게 드리운 한반도의 원자력 안개를 거두기 위해 협상의 성과를 부풀린 건 아닐까. 한미협정의 진의는 무엇이고, 한국정부의 협상능력은 어떠했나.

농축과 재처리는 원전에서 태우는 연료를 만들거나 태우고 난 연료를 다시 쓰는데 필요한 기술이지만 자칫 폭탄을 만드는데도 쓰일 수 있다. 현재 국제법상 평화적 목적의 농축과 재처리를 금지하는 법규가 딱히 없기 때문에, 미국은 양자간 원자력협정이라는 족쇄로 상대국의 원전산업을 원조해 주는 대신 농축과 재처리를 금지해 왔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은 4년 넘게 농축과 재처리가 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쓰고 난 연료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허가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개정협약에는 이러한 요구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필자가 아직 원문을 접하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합의가 이루어진 부분은 20% 미만 우라늄 저농축이 필요할 경우 향후 한미 간 협의를 통해 추진할 수도 있으며, 한국이 재처리 대신 추진하고 있는 고온건식 재처리, 소위 파이로프로세싱 여부도 향후 협의를 통해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은 파이로프로세싱이 재처리가 아닌 재활용이라는 아리송한 신조어를 쓰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처리가 맞다.

미국이 이미 한국의 파이로프로세싱을 허가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 최초 단계, 즉 전기분해로 핵연료에 들어있는 산소 성분을 떼어내 플루토늄 등 금속만 긁어 모으는 소위 환원만을 허용한 것이지, 제련이나 정련 등 후속 고난도 기술 포함, 재처리에 합의한 것은 아니다.

예선 결과를 보고 본선 진출을 가늠하자는 건데 현재로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농축이건 재처리건 향후 미국의 협의가 없으면 안 된다. 결국 미 정부가 한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외교적인 수사(修辭)를 썼을 뿐, 실질적으로는 원래 협정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미국산 핵연료가 농축이나 재처리에 사용될 경우, 미국 의회의 까다로운 동의를 거쳐야 하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또 정부는 동 협정이 농축과 재처리를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소위 '황금률'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주장한다. 언론매체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 원자력협정을 맺을 때 꼭 포함시켰던 이 조항이 이번 한미 협정에선 빠졌다고 대서특필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세계에서 미국의 황금률에 동의한 나라는 2009년 아랍에미리트와 2014년 대만뿐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이제 원자력을 시작하는 마당에 이 조항이 미치는 영향이 별로 없는데다, 미국이 다른 중동 국가와 원자력협정을 체결할 때 이 조항을 적용하지 않을 경우 무효가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대만은 비교적 선진 기술을 갖고 있긴 하지만, 국토가 ‘불의 고리’에 위치한 점을 고려, 현재 가동 중인 3기 원전을 운영허가 만료 시점에 모두 폐로하기로 결정했다.

즉, 이런 상황에서 굳이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난 3월 체결된 미-베트남 원자력협정에도 이 조항이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는 동 협정 서문이 우리의 평화적 핵이용권과 주권불가침 권리를 인정했다며, 동 협정이 기존 협정의 불평등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고 자축했다.

그런데, 국제협정에서 서문은 통상적으로 미사여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법적 효력이 있는 세부적인 규정들을 보면 그런 원칙이나 규범들이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문에서는 거창하게 나가다가, 정작 세부 조항은 별 볼일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문만 보고 평화적 핵 주권을 보장받고, 한미간 불평등을 해소했다고 자평하는 것은 국민에게 호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보다 우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일본이나 인도에 비해 많은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 이미 1988년 일본에게 농축과 재처리를 허용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미일 협정 체결 당시에는 핵확산 위협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지만 현재는 농축과 재처리 기술 확산이 민감한 문제로 부각했다면서 한일간 형평성 문제를 일축해 왔다.

그렇다면 2008년에 체결된 미-인도 원자력협정은 어떤가. 인도는 핵비확산기구에도 들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국내법과 국제규약까지 수정해 가면서 인도와의 원자력협력을 강행했다.

또한, 지난 4월초 미국은 이란의 농축과 재처리 활동을 일부 인정했다.

한국은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할 만큼 핵비확산에도 앞장을 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적 목적을 위한 농축과 재처리에 대한 제재를 받는 반면, 인도와 이란은 핵확산 위협을 제고시켰음에도 농축과 재처리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형평성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물론 기존 협정에 비해 개선된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한미 양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한 제3국에 대해서는 국내 원자력 수출업계가 미국 동의를 받을 필요 없이 미국산 핵물질이나 원자력 장비 등을 자유롭게 재이전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우리의 원전 수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협상에서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양보했고, 우리 정부는 약속했던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정부의 협상능력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필자도 미국 전문가들로부터 우리 정부에 핵전문가가 없어 협상이 힘들다는 불만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어, 혹시 우리의 역량이 부족해 협상에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노파심이 든다. 한국이 양보를 한 만큼 미국의 양보도 끌어내야지, 우리가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국내에 선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제협정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 국내에서도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외교는 정부의 몫이지만, 국제협정은 국회비준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한미원자력협정은 향후 20년 국내 경제는 물론 에너지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대한민국의 에너지 백년대계를 국민과 함께 다시 짤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원자력협정,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이제 막 시작한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고 ‘행복한 끝’을 나눠 갖기 위한 발자취를 남기자. 차려놓은 젯밥에 향불을 피워 올리자.

20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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