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가을은 해시계 위에 그림자를 얹을 때. 갈바람과 함께 신화와 실화가 뒤섞이고, 가을비와 함께 희망과 실망이 엇갈린다.

올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게다가 끝나지 않을 후쿠시마는 원자력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듯하다. 원자력이 다시 일어서려면 국민적, 사회적, 정치적 버팀목이 필요하다.

싫든 좋든 원자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차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자력은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병을 앓는지도 모른다. 원전은 현대가 이룬 기념비적 역사이다. 화석의 굴레에서 벗어난 원전은 우리에게 새롭고 값싼 에너지를 누리게 했다.

그러나 후쿠시마는 문명의 이기가 하루아침에 인류의 재앙으로 덮칠 수 있다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시간이 멈춰선 후쿠시마, 무너진 누리와 마을, 끊어진 길목과 골목, 날아간 지붕과 떠나간 사람들, 녹아내린 원전과 잃어버린 안전. 애당초 신화는 없었다. 오늘도 방사성 원소는 은밀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넘치는 지하수와 함께 땅과 바다로 스며들고, 갈바람과 함께 흩어지고, 가을비와 함께 내리고 있다.

아마겟돈, 세상 끝에 선과 악이 싸우는 대결전장이 바로 이 곳일 수도 있다. 도쿄전력이 그럭저럭 수습할 정도의 사고로 치부해왔던 일본정부가 지금에 와서야 국가가 전면에 나서 수습해야 할 상황이라고 인정하면서 후쿠시마 사태는 이제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지구촌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난 2011년 3월 11일 언론에는 원전 방사능 일촉즉발 위기, 비상사태 계속이라는 기사가 올랐다. 돌이켜보면 일본은 첫날부터 거짓말을 했고, 책임 회피, 늑장 발표, 사태 축소, 정보 차단, 진상 은폐를 일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정부는 긴급사태를 발령했다고 밝히면서도 원자로의 냉각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일 뿐 방사성 물질 누출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원자로가 과열되면서 수증기가 가득 차 격납용기가 터질 위험이 커지자 방사성 증기를 빼내기 시작했다.

필자는 사고 발생 사흘 뒤인 3월 14일 “핵연료가 이미 녹아내리고 원자로 바닥이 뚫리기 시작”한 것으로 예단하고, 1주일 뒤 "지금이라도 콘크리트로 원전을 모두 덮어야 한다"고 복구불능으로 최종 판결했다. 2년 반이 훌쩍 지난 지금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본정부는 사고 두 달이 지나서야 후쿠시마 1, 2, 3호기가 모두 녹아내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해 12월 16일 원자로가 냉온정지에 들어갔음을 선언한다. 냉온정지는 핵연료가 안정적으로 식혀져 온도가 100도 밑으로 떨어진 상태. 하지만 필자는 "원자로는 이미 구멍 나고, 지금도 핵연료가 녹고 있다"면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개탄했다.

최근 일본정부는 원전 주변의 땅을 얼려버린다든지, 방사성 오염수를 정화한다든지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내놓는 대책들은 2020년 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급조한 공상과학 같은 소설이고, 이젠 콘크리트로 막는 방법도 실행이 불가능해졌다.

콘크리트로 원전을 덮는 것도 최소한 더 이상 핵연료가 녹지 않도록 조치한 다음에야 가능한데, 2년 반이 지나도록 냉온정지도 못시킨 것이다. 핵연료가 녹아내리면서 콘크리트 바닥까지 사그라져 이제는 토양에 스며들고, 밑으로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어 먹이사슬 전체가 오염될 위기에 처해 있다. 후쿠시마 사태는 더 이상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차원에서 수습에 나서야 할 상황이다.

게다가 1, 2, 3호기보다 4호기가 더욱 걱정이다. 이미 벽과 지붕이 날아가 버린 이곳에 1300개가 넘는 핵연료다발이 7층 높이 수조에 담겨있지만, 더 이상 냉각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8월 25일 도쿄전력은 4호기 핵연료저장조에서 10톤가량 물이 빠져나갔다고 밝혔다. 4호기마저 무너지면 아마겟돈이 따로 없을 것이다.

서곡은 이미 울리고 있다. 그동안 판치던 일본의 정치악은 뒤로 하고 인류의 공동선을 찾아 나설 때. 일본은 멀리 가지 말고 한국이 갖고 있는 유리화 기술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후쿠시마, 응답하라.

201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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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균렬 교수가 일본 후쿠시마 사고 후 쓴 글로 2013년 10월24일 모 신문에 게재한 글임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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