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 본지 객원 편집위원

“원자력의 민간이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은 핵연료 재처리에 대해 사안별로 공동결정을 하도록 돼 있으나 농축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다. 1978년 강화된 미국 핵확산금지 정책으로 농축은 개정 과정에서 오히려 뒷걸음질할 가능성도 있다.

1956년에 처음 체결되어 1972년 원전 도입을 계기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이 협정은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다. 여기엔 핵연료에 대한 통제권을 처음부터 미국에 내주었고,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떠한 장비나 시설, 기술개발도 할 수 없다고 못 박혀 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는 농축은 물론 재처리까지 허용했으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이를 가로막았다. 이렇듯 국제법적 근거도, 최소한의 객관성도 없이 만들어진 게 한미원자력협정이다. 국내 핵주권론자들은 일본은 농축, 재처리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느냐는 애국논리를 펴고 있다.

정부가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려는 것은 맞지만 지금처럼 몰아가는 것은 안타깝다. 외교협상 이전에 국내합의도 없는 데다 개정에 성공한다 해도 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2004년 로카쇼무라의 시운전을 시작했지만 20조 원 넘게 집어넣고도 사고가 끊이지 않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정부가 이번 협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농축과 재처리 시설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국민시각은 크게 달라졌으며,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에너지는 국민안녕과 국가안보가 걸린 백년대계의 문제다.

재처리에 대해서는 확립된 정책도 수렴된 公論도 없다. 협상에 임하기 전 국민적 공감과 사회적 합의를 끌어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과학은 하지만 언어를 모르는 부서와 언어는 하지만 과학을 모르는 부서를 등에 업고 국익과 논리를 앞세운 미국 국무부와 비대칭 空論을 지속하고 있다.

국내 원자력계는 1980년대 미국이 그만 둔 고온처리기술, 즉 파이로 프로세싱을 들여와 2020년을 목표로 공동연구 중이다. 완성되면 핵무기로 돌려 쓸 가능성은 없으면서도 핵연료를 96%까지 재활용할 수 있고, 폐기물량도 10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직은 미래 공상소설과 집단 이기주의에 머물고 있다. 이미 기술력을 확보한 스위스, 독일은 재처리를 포기했고, 영국도 재처리 시설을 폐쇄할 계획이란 것을 아는가. 설령 재활용 연료를 확보한다고 해도 이를 태울 아궁이, 즉 고속로는 핵융합로 개발보다 갈 길이 멀다.

농축이나 재처리 권한을 설사 얻는다 치더라도 비좁은 나라에 건설하는 것은 사상누각이다. 우리는 원전에서 쓰고 난 장갑이나 신발 처분장 건설을 놓고서도 힘겨운 사회갈등을 겪었다. 훨씬 위험한 농축, 재처리 공장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에겐 이제 뒷마당도 옆마당도 뵈지 않는다.

농축과 재처리로 핵연료 국산화를 이뤄야 한다지만 재처리 시설을 갖춘 미국도 1972년 이후 재처리 연료를 쓰지 않고 있다. 핵연료를 사용한 다음 버리는 것이 재처리해 다시 쓰는 것보다 싸기 때문이다. 국가 간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지만 미국 블루리본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미협정의 마지노선은 양국 간 원전수출 공동전선 구축이다. 합종연횡 세계시장에서 지금처럼 독야청청하다가는, 핵연료 타령만 하다가는 10년 이내 한국은 협정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원자력 斜陽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패착은 이제 그만, 신의 한 수가 목마른데 시간이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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