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에너지국장)

구한말 정세와 작금의 상황을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 시작된 경제 침탈,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경제를 일본에 영구히 종속화하려는 일본의 야욕에 다름 아닌 현상에 대한 담론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번 한일 경제전쟁이 한 세기 전 구한말 당시와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르다고 보는 것 같다. 세계최강 반도체 부문은 삼성, LG, SK 등에서 자구책을 준비했거나 대응중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동안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온 부품들을 쓰는 것이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산업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아베 정부만 몰랐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기업을 비롯한 산업계는 한일관계가 우호적으로 유지되길 바라지만 아베정부 같은 호전적 정권이 재집권할 경우 향후에도 이번과 같은 일방적 화이트리스트 배제 같은 거의 국가 조폭 같은 행동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리라 보기에 기술국산화에 전력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독자적인 기술국산화를 준비해온 중소중견기업들이 지속적인 생존을 할 수 있도록 관련 대기업,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에너지업계도 마찬가지다.

마중물이라는 경영표현은 한전 조환익 전 사장이 주로 사용한 단어다. 한전이 새로운 전력산업, 특히 신재생에너지사업 활성화를 위해 국내 최대 공기업 맏형으로서 관련 중소중견기업들이 자신 있게 기업활동을 하고 기술개발에 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경영이론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에너지기술 선진국 제품에 비해 효율이 몇퍼센트 떨어지더라도 국내 기업이 이걸 사주고 사용하면서 선진국과의 격차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혜안이었다. 

일본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촉발된 국내 기술자립화 문제에 대해 국내 발전공기업들이 호응하고 나섰다.

한국동서발전이 최근 500억원 정도를 내놓겠다고 발표한데 이어 바로 한국수력원자력이 1000억원을 기술개발 R&D 자금으로 국내 중소중견기업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남부발전, 서부발전, 남동발전 등 발전공기업 모두 각각 200~300억원 정도의 자금을 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략 발전공기업에서만 3000억원 정도의 기술자립화 R&D 자금과 관련 중소중견기업 육성을 위한 마중물 재원이 마련되는 셈이다.

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등 굵직굵직한 에너지공기업들이 가세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실물경제 살리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부에 큰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원전, 화력발전이 사양산업이라고 할지라도 관련 터빈 기술은 산업체, 항공, 선박 등 전방위에서 사용된다. 지난 10여년 동안 준비해놓은 그러나 숨겨놓은 기술이 있다. 정부는 이것을 다시 찾아내 일으켜 관련기술 국산화에 매진해야 한다. 

여기에 일본이 놓친 부분이 있다. 국산화기술 마중물 역할을 하는 발전 공기업의 최근 행보는 역시 공기업이기에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다.

친일 정권이었던 박근혜 정부가 탄핵 움직임이 있기 직전이던 2015년 에너지공기업을 졸속으로 민영화하려다 실패한 사례가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국내공기업 죽여 놓고 화이트리스트를 사용해 한국을 초토화시키려했던 아베정권의 집요한 준비작업 아니었나 생각하니 다시금 치를 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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